불꽃처럼 사는 E.T 할아버지, 채규철

온몸 화상 딛고 농촌계몽 한 길
가평=김미리기자 miri@chosun.com
입력 : 2005.06.02 14:47 40' / 수정 : 2005.06.03 00:05 15'



▲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 선생의 오그라든 손가락이 신균이(상색초등학교6학년) 손가락과 맞닿았다. 두 마음이 하나가 됐다. 아이들은 채 선생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였다. 가평 두밀리에서.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기자 (블로그)canyou.chosun.com
아이들은 그를 ‘이티(E.T.) 할아버지’라 부른다. ‘이미 타버린 사람’을 줄인 말이기도 하고, 정말 온몸이 주름져 있는 외계인처럼 생겨 붙은 별명이기도 하다. 채규철(68) 선생. 27년 전 화상으로 손은 오리발처럼 붙어버렸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귀는 다 녹아내렸다. 사람의 외양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공포영화 속 흉측한 괴물에 가까운 ‘이티 선생’. 이 몸으로 40년 넘게 농촌계몽 운동, 한 길을 걸어 왔다.

선생을 처음 봤을 때 한참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참혹한 고통의 흔적 앞에 말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나 젊지? 얼굴에 다림질 한번 세게 해놨더니 주름살 하나 없이 쫙 펴졌지 뭐야. 늙지도 않는다니까, 허허.”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선생이었다. 농담도 농담이지만, 다 녹아내린 입술 사이로 사람 소리, 그것도 고희에 다다른 할아버지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쨍한 소리가 새어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눈을 맞추어 선생의 마음에 닿고 싶었다. 하지만 부릅뜬 오른쪽 눈은 끔뻑이질 않았고, 왼쪽 눈은 살에 반쯤 파묻혀 있으니 어느 눈을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 찰나 그가 또 입을 뗀다. “아무데나 봐도 돼. 오른쪽 눈으로는 마음을, 왼쪽 눈으로는 얼굴을 보니까 다 보여.” 선생의 오른쪽 눈은 의안이었다. 매일 밤 부인 유정희(55)씨가 그 ‘마음을 보는 눈’을 식염수로 소독해 준다.


▲ 사고 전 채규철
젊은 시절의 채규철은 남부럽지 않은 외모에 똑똑하고 신념 굳은 청년이었다. 함경도 함흥에서 농촌봉사를 하던 목사 아버지와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농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산에 정착해 살다가 열일곱에 혈혈단신 상경했다. 길거리에서, 천막교회 한쪽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며 공부해 서울시립농업대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농촌 교육가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61년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곤궁한 아이들을 위한 고등공민학교였다. 아이들은 월사금 대신 보리 한 가마, 배 한 광주리 학교에 내고 ABCD를 배웠다.

“애들이 주말이면 거름 만들 똥 퍼서 지게에 담고 다녀. 그걸 보고 옆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똥통학교’라 놀려댔지. 배우고 싶어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던 녀석들, 고 맑은 녀석들이 내게는 선생님이었어.” 똥통학교는 채규철에게 운명의 두 여인을 줬다. 첫째 아내 조성례. 풀무학교 가정교사였다. 둘째 아내 유정희. 풀무학교에서 그를 따르던 제자였다.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첫째 아내는 선생이 사고를 당한 두 해 뒤 가슴 병까지 얻어 하늘로 갔다. 당시 선생 집에서 살림을 해주며 두 아들 진석이와 광석이를 보살펴주던 제자 유정희는 두 아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선생의 동반자가 됐다. 사고도, 결혼도, 채규철을 둘러싼 것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전개됐다.

애써 묻어둔 악몽을 기억케 하는 것, 괴로운 노릇이다. 그래도 결국 물었다, 온몸이 녹아내린 그 사고를. 이티 선생이 뭉뚝한 손마디 사이에 담배를 구겨 넣는다. “1968년 10월 30일이었어….”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서늘했다. 운좋게 혼자 덴마크에 한 2년 동안 유학갔다 왔더니 그 사이에 부인은 폐결핵이 너무 심해 부산에 가 있었다. 거기서 그는 장기려 박사(전 부산 복음병원 원장, 평생 가난한 이와 함께 하다 1995년 제 몸 누일 한 평 공간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가 ‘바보 의사’로 불렸다)와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료보험 같은 제도다)’를 만들고 여기저기 강의 다니며 바삐 살았다.

“그날, 한 영아원 사람들하고 친분있던 장로가 하시던 양계장 견학간다고 김해로 갔지. 돌아오는 길에 좀 빨리 오려고 운전하는 사람이 지름길을 택했어. 길이 험하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차가 한쪽으로 휙 기울더니 언덕을 구르고 있는 거야. 몇 초 지났을까 우리는 불구덩이에 휩싸였어.”

공교롭게도 차에는 영아원 사람들이 페인트칠하려고 사놓은 시너 두 통이 들어 있었다. 차가 구르는 사이 일행 네 사람은 시너를 홀딱 뒤집어쓰고 말았다. 모두 장작개비처럼 활활 타들어갔다. 미리 철저하게 짜인 비극의 덫에 걸려든 것만 같았다. 넷 중 둘은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운전기사는 경미한 화상을, 채규철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처참했다. 정신이 들고 녹아내린 몸을 보는 순간 다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었다. 손가락도 입술도 귀도,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딱 한마디 하셨다. “…아들아, 수고했다.” 그리고 피눈물을 쏟아 내셨다. 채규철은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다. 눈물샘이 타버린 것이다. 그저 가슴으로 통곡할 수밖에. 그날 아버지 눈에 섰던 핏발은 돌아가실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 그림 = 우리교육제공
병마와의 지루한 싸움이 시작됐다. 꼬박 6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수술을 받았다. 스물일곱 번이었다. “이 몸 말야, 이래봬도 무지 비싼 거야. 수십 명이 달려들어 만든 걸작품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 손 안 간 데가 없단 말야.” 그 중에서도 원주 기독병원에서 받은 성형 수술은 잊지 못할 수술이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미국인 의사 로스 박사는 사고 전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오라 했다. “사고 전의 제일 예쁜 사진을 가져와요. 내가 그걸 보고 예쁘게 해줄 테니.” 아내는 약혼식 사진을 가져왔다. 포마드 듬뿍 발라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에, 나비넥타이를 맨 핸섬한 청년 채규철. 불가능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아내는 기억 속에서 가장 멋졌던 순간의 채규철을 가지고 왔다. “야, 정말 잘 생겼네. 사탄이 시기해서 일을 저지를 만했네요.” 로스 박사의 유머와 함께 지금의 ‘이티 채규철’이 완성됐다.

병상에서 일어서자마자 채규철은 사고 전 해오던 청십자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간질환자 진료사업모임인 ‘장미회’를 새로 꾸렸다. 한없는 비관이 밀려올 때면 도망치듯 새로운 일들을 벌이곤 했다. 그리고 1986년 마음 맞는 친구 몇몇과 경기도 가평에 천막 하나 달랑 치고 ‘두밀리자연학교( 별도기사 )’를 열었다. 학교에는 분필 가루가 날리지도 않았고, 회초리도 없었다. 숲이 운동장이요, 들판의 풀들이 살아 있는 생물 교과서였다. 밤 하늘 가득 수놓은 별들이 과학 선생님이었다.

“으흐흐, 난 이티다! 이티 할아버지 고향별 한번 볼까?”

아이들은 이티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농담도 곧잘 해대는 녀석들. 어느새 아이들 마음은 이티 선생의 오그라든 손가락을 타고 들어와 하나가 됐다. 영화 속 이티가 아이들과 손끝을 맞대고 친구가 되었듯이.

그래도 장애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다방에 들어가면 주인이 1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 주고 나가라고 고함쳤어. 그러면 그 돈 보태 차 한 잔 먹고 나왔어. 차비 안 받는 버스기사한테 끝까지 병신 아니라며 동전을 넣었어.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런 선생에게 아이들, 그리고 자연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에 파묻혀 남몰래 운 적이 몇 번이며, 천진한 아이 웃음에 기대 날려버린 슬픔이 또 얼마던가.

얼마 전 두밀리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이티 선생은 쓸쓸하다. 요즘엔 선생 말대로 근처에 ‘새끼친’ 백둔리자연학교, 분당맹산자연학교에서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두밀리 시절 같지는 않다. “이제 다 늙었는데 뭘…”하며 자위하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가족들 고생은 안 봐도 훤했다. 괴물처럼 변한 채 선생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한 아내 유정희씨. 어머니는 물론이고, 선생의 딱한 사정을 알던 풀무학교 친구들조차 뜯어말렸지만 기어코 그 길을 갔던 그녀였다. 모두가 희생이라고 했다. 그녀만은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밖에서 당한 설움은 고스란히 가족들 몫이 됐다. 슬픈 건 슬픈 거고, 아픈 건 아픈 거다. 술로 응어리를 풀었다. 술 취한 채규철은 하루가 멀다하고 밥상을 뒤집었다. 장롱 열고 이불에 불 붙이려 하는 걸 아들이 겨우 막은 일도 있었다. 시련을 겪은 가족은 조금씩 균열됐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대단해요. 아버지야 숙명이라고 생각해도, 어머니는 운명을 스스로 택하신 분이잖아요.” 아버지의 주사(酒邪)로 한때 방황했던 큰 아들 진석(41·인천대 교수)씨,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존경 한편에 꿈틀대는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함께 사고를 당한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낼까 문득 궁금해졌다. “사고 나고 몇 년 뒤에 편지가 한 통 왔어. 뜯어보니 장문의 편지랑 1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있네. 아, 그 운전했던 양반이더라고.”

차를 몰았던 임중기(당시 영아원 교사)씨는 사고가 나고 소식이 끊겼다. 그 사람이 신문에서 채 선생 얘기를 읽고 편지와 선생이 벌이고 있던 청십자 운동에 쓰라고 수표 한 장을 부친 거였다.

몇 년 뒤 어느 강의 자리에서 둘은 재회했다. 예전의 모습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채 선생 앞에서 임씨는 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하지 말라고. 다 운명이려니 해. 나 자네 원망 하나도 안 하니까 이젠 짐 좀 덜게.” 지금은 마산 홍익재활원을 운영하며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임씨는 선생이 그렇게 고사했건만, 아직 선생 부인 통장으로 매달 30만원씩 부친다.

그래, 용서다.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우리 사는 데 ‘F’가 두 개 필요해. ‘Forget(잊어버리라), Forgive(용서하라).’ 사고 난 뒤 그 고통 잊지 않았으면 나 지금처럼 못 살았어. 잊어야 그 자리에 또 새 걸 채우지. 또 이미 지나간 일 누구 잘못이 어딨어.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 받는 거야.”

그를 만나던 날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했다.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 이미 타버렸지만 이슬처럼 티없이 맑았다.

● '사라져 버린' ET 할아버지의 두밀리 자연학교

농지에 아이들 샤워장 세워 '농지불법전용' 이유로 폐교

1994년 폐교 위기에 놓인 초등학교 분교 하나를 두고 시민단체와 교육 당국이 엄청나게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다. 경기도 상색초등학교 두밀분교다. 연유야 어찌됐건 분교는 폐교됐다.

경춘가도에서 두밀리로 들어가서 분교터에 조금 못 미치는 곳 왼편 숲 속에 두밀분교처럼 ‘사라져 버린’ 학교가 하나 있다. 채규철 선생이 마지막으로 정열을 불태운 대안학교 ‘두밀리자연학교’다. 해마다 5월부터 9월까지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선생님들과 함께 반디(채 선생은 ‘반딧불이’라는 공식명칭을 싫어한다. “그러면 반딧불이 꽁무니의 불은 반딧불잇불이란 말이가”라며)를 잡고 개울에서 생전 처음 보는 플라나리아를 잡고, 자기 이름이 적힌 텃밭에서 옥수수를 기르고 밤에는 귀신놀이를 하던 곳이다. 이 학교 출신 아이들이 자라나 또 다른 대안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친다. 그 두밀리자연학교가 이제는 없다.

두밀리 골짜기가 차츰 개발되면서 길이 뚫리고 대규모 펜션들이 들어서고 외지인 왕래가 잦아져 ‘가르칠 자연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지난해 가평군에서 ‘농지 불법 전용’이라는 범죄행위를 들고 나선 게 결정적인 이유다. 1500평짜리 이 땅에는 대지 용도 땅이 세 군데 있는데 교실로 쓰던 원두막, 아이들 노는 컨테이너 자리, 그리고 채 선생이 묵던 허름한 집 하나 자리였다. 그런데 아이들 몸 씻으라고 농지에 샤워장 하나 만들었다는 거다. 샤워장은 허물어지고, 결국 작년 5월을 끝으로 두밀리학교는 문을 닫았다. 개교한 지 15년 만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전북 장수군에서 마련해준 터에 또 다른 자연학교를 열었다. 하지만 거리가 워낙 먼 데다 선생님들이 지친 까닭에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채 선생은 “내 나이 70인데, 이제 또 뭘 해” 한다. 지금은 귀농 공동체인 소나무공동체가 이 터를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전국 대안학교의 선구였던 두밀리, 조금은 허망한 이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ET 할아버지 책 나왔어요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 선생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따뜻한 동화로 엮어져 나왔다.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부터 거제도 피란 시절 이야기, 교통 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다시 농촌 교육가로 일어서기까지의 사연들이 잔잔한 그림과 함께 펼쳐진다. 글 이섶·그림 원유미. 우리교육. 6500원. (02)3142-6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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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6/200506020184.html

Posted by 【洪】IL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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