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0㎞ 국내 산줄기 '10년 발품' 정리
3800㎞ 국내 산줄기 '10년 발품'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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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은 우리 인생살이와 비슷해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지요. 길을 잘못 들어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실 올라갈 때는 힘은 들지만 길을 잃지는 않아요. 하산길을 찾기가 더 힘들지요. 내려오다 보면 사방에 갈림길이 많습니다. 지도와 나침반으로도 종종 속수무책이지요. 나침반은 직선으로 가리키지만 실제 길은 굽고 감겨 있어요. 조금만 소홀하면 엉뚱한 곳으로 빠집니다.”
박성태(朴成泰·61)씨는 삼겹살 안주에 소주잔을 비웠다. 그런 뒤 “저도 인생에서 내려오는 중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길을 찾아 내려오고 있는지 장담을 못 하겠어요”라고 했다. 그는 고졸에 9급공무원을 지냈고, 세무사 출신이다. 초로에 접어든 일상의 사내였다.
그런 그가 10년간 도상(圖上)거리로만 3800km 되는 국내 산줄기를 일일이 답파한 뒤 ‘신산경표(新山經表·조선일보刊)’라는 책을 펴냈다. 자신의 동네 뒷산이 어떤 산줄기에 속해 있고 다른 산과 어떻게 연결되며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한눈에 산의 족보와 흐름을 알게 해준다.
“원래 ‘산경표’는 조선후기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저술로 알려져 있지요. 집안의 족보처럼 산줄기의 계통을 정리해 놓은 도표입니다. 산줄기가 서로 연결되고 백두산까지 이어진다는 게 궁금했어요. 과연 중간에 끊기지 않고 다른 산줄기로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역으로 만드는 과정을 발로 따라가 본 겁니다.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현대지도를 가지고 산경표가 만들어질 때의 방식으로 다시 한 번 걸어 봤던 것이지요.”
그는 국내의 산줄기를 답파하면서 2만5000분의 1 지형도 650장을 샀다고 한다. 지도에 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길을 찾아나섰다. 지도에 나오지 않은 작은 산도 있었고, 어떤 곳에 가면 막혀 있었다.
“먼저 올라간 이가 없어 사전정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어요. 길을 잘못 택해 2~3시간씩 헤매다 내려오기도 했고, 남쪽 지방의 산에서는 가시가 많아 옷을 여러 벌 준비해 찢어지면 갈아입곤 했습니다. 낯선 산길을 가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가자고 권하지 못 했어요. 주로 혼자 혹은 집사람과 다녔습니다. 대중교통으로 현지에 도착해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가는 식이지요. 직장을 그만 두기 전에는 주말밖에 시간이 없었으니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꼭 갔습니다.”
기자는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니, 왜 선생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걸 해야 했는가?”라고.
“꼭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직접 걸어보고 지도에 표시하고 나면 제가 가본 곳은 잘 알게 됐어요. 나중에 산줄기를 타려는 사람이 있어 제게 물으면, ‘이렇게 갔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다, 길 상태는 어떻다’는 것을 대답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꼼꼼하게 기록했지요. 산에서는 서로 음식을 나눠 먹듯이 그런 정보들을 모아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상업적이 아니어서 눈길을 못 끌었어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알릴까 생각하다 책을 만들었습니다. 책이 안 팔려 출판사에 손해를 끼칠까 봐 걱정돼요.”
그는 공무원을 하다가 세무사로 전환했는데, 별로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면 “돈벌이를 잘 할 만큼 융통성이 없어” 98년에 그만뒀다. 그러면서 “평생 숫자를 만지고 성격이 꼼꼼하다 보니 전혀 엉뚱하게 산줄기 지도를 만들게 됐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동 거리를 계산하고 직접 지도를 그리고, 목표한 곳까지 마치고 내려오면 정말 기분이 좋지요.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간 곳을 가면 편할지는 모르나, 안 가본 곳을 가는 맛도 있어요. 남이 보면 제가 미쳤다 하겠지만 그 지경쯤 돼야 묘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40대 초반에 늦게 산행을 시작했다. 1992년 설악산 황철봉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팀을 만나 태백까지 내려온 것이 묘미(妙味)의 계기가 됐다. 그 뒤로 백두대간 진부령에서 화방재까지, 곧이어 93년 3월에는 지리산까지 답파했다. 그즈음 조선시대 산줄기를 정리해놓은 ‘산경표’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원래 체력이 약해 다른 사람들과 다니면 뒤처지기 때문에 산을 피했지요. 지금도 체력이 약합니다. 산을 오르다 한두 번 졸도도 했으니. 저는 빨리 못 걸어요. 대신 지구력은 있어요. 산악회 사람들과 같이 가면 출발은 맨 꼴찌이지만 나중에는 중간쯤 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걸으니까요.”
술잔에 술이 떨어지자, 그가 10년간 발품을 팔아 전력투구한 행위가 참으로 우둔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잡념도 슬며시 들었다.
“인공위성을 이용하면 산길을 안 밟고도 입체지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들고, 직접 확인하지 못해 애매한 지점이 나오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제가 한 것이 시대를 거스른 짓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삶에 세상 흐름을 꼭 따라가란 법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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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1/2004112205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