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역도선수의 '마이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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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지난 아기가 소아마비로 인해 목 위만 살아있어 의사가 가망이 없다했을 때 제 아버지께서 저에 대한 희망을 놓으셨다면 지금의 제가 없겠죠.”장애 아동에 대한 편견이 있던 시절 일반인과 똑같이 키우기 위해 목발도 휠체어도 아닌 세 발 자전거를 사줘가면서 강하게 키우셨다는 아버지의 회상으로 조수남씨의 강연은 시작되었다.
“전 천부적으로 운동신경이 타고 났나봐요.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목발을 짚어 보고는 날라 다닐 정도였고, 학교에서는 야구4번 타자, 포수, 골키퍼 등 운동의 다방면에서 인정 받았어요.”
운동을 사랑하는 그의 추억담에는 자랑스러웠던 시절에 대한 벅찬 감동이 묻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소아마비 정립회관에 나가 운동을 즐겼으며, 그의 열의는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학교 종합 1등의 성과를 이룩하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1980년 세계장애인의 해에는 육상선수, 수영선수로 뛰었며, 1988년 서울 장애인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처음 달고 좌식 배구를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 때문에 류마티스 관절염까지 앓게돼 환절기마다 몸이 굳어지는 시련을 겪었고, 병의 치료 과정에서 부모님의 폐물까지 팔아야만 했던 안타까운 시절도 맞았었다. 병의 재발을 우려해 무리한 운동을 하는 것에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지만, 태극마크를 단 아들 자랑을 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힘이나 더욱 열심히 하게 됐다고 한다.
1992년에 접어들면서 운동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회를 찾던 조선수는 오전에는 가구회사에서 근무하고, 오후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역도선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운동하는 모습을 죽 지켜봤다며 근육을 만져보시는 역도감독님의 권유와 역도선수들의 은퇴로 불안정해진 역도계의 계보를 이어가고자 그는 역도선수로 입문하였고, 이 때 중학교 2학년 때 장애인 청소년 캠프에서 만나 친구로 지내던 현재의 아내에게 함께 역도를 같이 할 것을 권했다. 조씨 부부는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선수단 중 유일한 커플이다.
그런데 결혼생활 얼마 되지 않아 맞은 IMF외환위기는 사업실패라는 시련을 주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수는 아내의 운동을 후원해주는 조력자 역할을 위해 취업전선에 뛰어 현재는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운동을 중독이라고 표현하는 조선수는 운동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는 질문에 “처음엔 개인적인 영광의 기쁨이 컸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들을 위해서 아들 앞에 당당하고 자랑스런 부모가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합니다. 나라를 위해 딴 금메달 아들 목에 걸어주렵니다.”
현재 국내에는 장애인 선수 전용선수촌이 없고, 운동 공간도 부족한 실정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장애인 선수들을 엘리트로 키우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 나라는 60세가 다 된 선수가 후임 선수가 없어 은퇴를 못하는 대책 미비의 후진 스포츠 국가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우리 나라 장애인 스포츠 발전 방향에 대해 조선수는 “장애인 체육 1세대들인 우리가 지금 기반을 닦아 놓아야 후배들의 운동여건이 개선되고, 우리나라의 도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세계와 나란히 어깨를 나눌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 나라에도 장애인 실업팀이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생각치 마세요. 내가 1분 걸려 하는 일을 그는 2분에 걸쳐 할뿐이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장애인들에게는 특성이 있고, 알고 그들을 대하면 더욱 세상은 따뜻해집니다. 장애, 비장애 나뉨 없이 모두 다 함께 둥글둥글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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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1/2004111202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