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밭의 낙지잡이 아버지 생각하며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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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합격했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한평생 갯벌에서 낙지를 잡아온 최창수(52)씨에게 지난해 12월 3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서울에 있는 큰 아들 승현(29)씨가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망우면의 작은 섬 탄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아무도 뭍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이곳에 현재 8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승현씨의 합격 소식이 전해진 날, 유사 이래 최초의 사법고시 합격자가 나온 작은 섬에서는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 탄도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망우면 주민들까지 “축하합니다” “워~매 오지게 좋겄소!”라고 최창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사무소 앞에는 “경축! 갯벌의 아들 최승현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낙지를 파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후로는 낙지 한 마리 팔 때마다 껄껄 웃더라니께”라고 전했다.
아버지 최창수씨의 말이다.
“어릴 때부터 아들이 공부는 잘 했소. 섬에서 학교 다닐 때는 내 농사일도 잘 도와줬고.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는 매번 장학금 받고 다녔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지 하고 싶은 거는 다 못하고 살았겠지만 불평 한번 안하고 반항 한번 안하고 착했지. 없으니까 아껴 살려고 바둥바둥 대는 모습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어쩌겄소. 다 지 팔자요. 아, 부모가 돈이 없는데 어쩔꺼여. 내려와서 선생이나 하면 더 바랄 게 없었는데.”
아들 승현씨는 전교생 수가 30명 남짓한 탄도분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혼자 섬을 나와 자취 생활을 했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경찰대학교를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아들 승현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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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대는 학비도 안 들고 생활비도 안 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성격이 좀 보수적이고 내성적이라 경찰 일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원했다가 떨어졌는데 조금 아쉽더라고요.”
그는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닌 그는 졸업 성적도 우수하다. 연세대 법학과 백태승 교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 할일 묵묵히 하는 말없는 학생”으로 그를 기억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한 번 낙방했다.
“공부가 부족했는지 떨어졌습니다. 1차 시험 한 번 떨어지고 보니까 계속 돈 들어갈 일만 생기는 것 같아서 우선 공군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제대해서 한 번에 붙겠다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군 제대 후, 여동생과 함께 사는 건국대 앞 자취방에서 고군분투, 2002년 사법고시 1차시험 합격, 2003년 2차시험 합격까지 한 번에 해냈다. 갯벌의 아들이 꿈을 이룬 것이다.
지난 11월 20일 오후 3시, 경기도 일산 장항동 사법연수원에서 최승현씨를 만났다. 그는 작년 사법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이후, 올 3월부터는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중학교 때였는데, 겨울 방학에 집에 가도 부모님이 안 계시더라고요. 겨울에는 할머니가 밥을 해주셨어요. 겨울에 한창 추울 때는 농사도 쉬고, 낙지잡이도 쉬는데, 어머니, 아버지는 목포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감귤 따러 가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울에 막일해서 돈 얼마나 버셨을까 싶은데, 그게 부모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매번 겨울 방학 때마다 집에 가도 안 계셨어요. 부모님께서 그렇게까지 고생하시는데, 불만 있고 부족한 일 있어도 말 하면 안되죠.”
사법고시를 보는 수험생들은 고시학원을 필수적으로 다녀야 하고, 사야 할 책도 많다고 한다. 요즘은 “고시도 돈이 있어야 본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고시 공부에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시원에는 안 들어갔어요. 요즘 서울 신림동 고시원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좀 불편해도 내가 사는 집이 있는데 괜히 따로 돈 쓸 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미안했어요. 그냥 여동생이랑 같이 살면서 고시 공부했습니다. 학원비며 책값, 밥값, 용돈까지 매달 50만원씩 아버지가 꼬박꼬박 부쳐주셨어요. 낙지 팔아 번 돈이요.”
그는 매달 갯벌에서 아버지가 부쳐주는 50만원으로 생활하고 고시 공부까지 했다. “돈이 모자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이다.
“괜찮소. 괜찮소. 할 만했어요. 내가 뭐하러 일하는데요. 낙지가 돈도 되고 효자지요. 낙지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아 부담도 안 되고. 나는 (낙지잡이) 오래 해서 (낙지) 구멍 잘 보는 편이에요. 한 번 나가면 한 60마리 파서, 15만원은 벌어요. 연세대 학비는 왜 그리 비싼지, 그래도 지가 장학금 반은 받아 왔으니까 학비도 낼 만했고, 고시 공부한다고 얼마씩 보내주는 것도 할 만했소. 서울 집값은 왜 또 그리 비싼지, 전셋값 3000만원 마련할 때 그 때 조금 힘듭디다.”
갯벌에서 낙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낙지잡이들은 보통 1~1.5m를 판다. 60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도합 60m 이상을 파야 한다.<주간조선 1830호, ‘현장체험-무안 갯벌 낙지잡이’ 기사 참조>
아들의 말이다.
“갯벌에서 땅 파는 아버지 생각하면서 제가 뭘 더 욕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돈 없어서 고시 공부 못하는 세상도 바르지 않지만, 돈 없다고 고시 공부 못 하겠다는 사람도 바르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부모님한테 받기만 했어요. 이제 저는 직장 잡고 시작입니다. 다시 돌려드릴 때가 됐는데,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기만 하면 좋겠어요. 평생 일하시느라 한번 쉬시지도 못하고, 여행 한번 못 갔다오시고. 부모님 인생이 말이 아니에요.”
동생도 사법고시 준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공무원으로서 첫 월급 73만원을 받은 날, 최승현씨는 갯벌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동대문시장을 찾아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옷을 사드렸다. “이런 날도 있구나, 아이고.” 어머니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펴는 몸으로 승현씨를 꼭 안아주었다. 어머니는 평생 농사일, 낙지잡이 일을 해오다 허리에 디스크가 왔다. 서울에서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았지만 2년 전 끝내 농사일은 접어야 했다. 아버지의 말이다.
“집사람이 많이 아파서 걱정이지. 허리를 곧게 펴고 못 다녀요. 그래도 아직 내 할 일이 끝나지 않았지. 막내 아들이 아직 대학생(성균관대 법대)인데. 막내도 사법고시 본다니까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줘야 하지 않겄소. 걱정이 태산이오. 그래도 통장에 벌어놓은 돈 좀 있고, 허리가 좀 안 좋긴 하지만 아직은 내 몸이 움직일 만하니까. 그 후에는 자기들이 알아서 다 살겠지. 그렇게들 키웠어.”
아들의 말이다.
“동생 학비랑 생활비를 어머니, 아버지가 다 책임지시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이제 제가 돈 벌게 됐으니까, 할 수 있는 한 도와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후에도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들의 꿈은 검사. 내년 이맘 때 쯤에는 갯벌의 아들이 검사가 되어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법연수원의 아들에게, 갯벌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이들 ‘행복한’ 부자(父子)에게 각각 물었지만, 둘 다 수줍어 말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좌우지간 우리한테 어떻게 하든가 나는 됐고, 지만 잘 되면 된다”고 아들에게 부담주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낙지 식당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난다”고 말하며 부모님께 받은 ‘사랑’에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랑스런 아버지에, 자랑스런 아들이다.
뭍에서 섬까지 1.5㎞ 넘게 펼쳐지는 황토색 무안 갯벌, 이 갯벌이 낙지를 키웠다. 낙지는 자식을 키웠다. 저기 갯벌에 아직 당신의 아버지가 서 있다.
“아들아, 장하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꼭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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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2/2004120400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