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엘료의 편지 3: 숲 속의 군인





활쏘기 연습을 할 곳을 찾느라 피레네 산맥을 헤매던 나는 우연히 프랑스 군인들의 야영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군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하며 계속 걸어갔다(우리는 스파이로 몰릴 가능성에 대해 모두 조금씩 피해망상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적절한 장소를 찾아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데, 웬 무장 차량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고 그들이 물을 만한 것들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나는 활쏘기 허가증을 지니고 있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건 군인의 임무가 아니라 산림 감시원의 임무다 등. 이윽고 대령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니 내게 혹시 작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이 지역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 자신도 책을 한권 썼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걸 쓰게 된 범상치 않은 계기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한센병(나병)에 걸린 한 어린아이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원래 인도에 살던 그 아이가 나중에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 그 어린 여자아이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던 부부는 수녀원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그들은 거기서 멋진 오후를 보냈다. 그런데 수녀들 중 한명이 그에게 아이들의 영적 교육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장 폴 세투(이 대령의 이름이다)는 자신은 교리문답을 지도해본 적은 없지만, 좀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할지 신에게 물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기도를 마친 그는 이런 응답을 들었다. "대답만 주려 하지 말고, 아이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라."

그 후 세투는 몇몇 학교를 방문해 아이들이 삶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들을 모두 받아적었다. 수줍음을 타는 아이들도 망설이지 않고 종이에 질문을 써냈다. 그 결과물이 모여 '항상 질문하는 아이'라는 한권의 책이 탄생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왜 우리는 외국인들을 두려워하나요?

화성인과 외계인은 존재하나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사고를 당하는 이유는 뭔가요?

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가 결국 죽을 거라면 왜 태어나야 하나요?

하늘의 별은 몇 개나 되나요?

누가 전쟁과 행복을 만들어냈나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가톨릭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주나요?

왜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 존재하나요?

왜 하느님은 모기와 파리를 만들었나요?

우리의 수호천사는 왜 우리가 슬플 때 곁에 없나요?

왜 우리는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게 되나요?

여러가지 색깔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느님이 천국에 있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천국에 있다면, 하느님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나요?


만약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선생님이 있다면 똑같이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 어른들이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이해를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 중앙일보, 200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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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년간 나는 세 가지 일에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았다. 여기서 '열정'이란 무엇을 읽든 그것과 관련된 것을 찾아내고,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열광을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나서고, 잠들 때나 깨어날 때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컴퓨터다. 타이프라이터를 포기하고 컴퓨터를 사면서 나는 엄청난 자유를 발견했다(지금 나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2㎏도 안되는 컴퓨터에 내 10년 동안의 직업적 삶을 모조리 담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5초 내에 찾을 수 있는 그것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다).

둘째는 인터넷이다.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당시에도 그것은 기존의 가장 큰 도서관 규모를 능가했다.

셋째는 이런 기술적 진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활쏘기다. 젊은 시절 나는 유진 헤리겔이 쓴 '궁술의 선(禪)'이라는 매혹적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궁술을 통해 영적 여행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내가 피레네 산맥에서 실제로 한 궁수와 맞닥뜨리면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그 궁수는 내게 활과 몇 개의 화살을 빌려주었으며, 그 후로 나는 활 연습을 하지 않고 지낸 날이 단 하루도 없다시피 했다.

브라질의 내 집에는 전용 과녁(손님이 찾아오면 즉시 접을 수 있는)이 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매일 야외에서 연습을 하는데, 그러다 자리에 드러눕는 일이 두 번이나 생겼다. 영하 6도의 날씨에 두 시간 넘게 밖에 있다가 저체온증에 걸렸고, 덕분에 강력한 진통제를 복용하고서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겨우 참석할 수 있었다. 이틀 전에는 잘못된 자세로 활을 쏘다가 근육에 심한 염증이 생겼다.

도대체 활쏘기의 어디에 이런 매력이 숨어 있는 걸까? 기원전 3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무기인 활은 사실 실용성은 없다. 하지만 내게 이런 열정을 일깨워준 유진 헤리겔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래 구절은 '궁술의 선'에 나오는 것들이지만 일상생활에도 두루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시위를 당길 때는 오직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라. 그렇지 않을 때는 에너지를 아껴라.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커다란 일보(一步)를 내디딜 필요는 없다. 그저 대상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스승은 내게 아주 뻣뻣한 활을 골라주었다. 나는 프로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정말 어려운 것에 직면할 준비를 할 수 없는 법이다. 길에서 만나게 될 어려움이 무엇인지 먼저 아는 편이 낫다."'

'나는 오랫동안 활을 정확히 당기는 법을 익히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날 스승이 알려준 호흡법대로 하자 어려움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나는 그동안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호흡법을 가르쳤다면 너는 그것이 별로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는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좋은 스승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활시위를 놓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에 앞서 활과 화살, 과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한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완벽히 대처하려면 직관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기술을 완벽히 마스터하고 났을 때에야 그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4년 후 내가 활쏘기를 마스터하자, 스승은 내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이제 여정(旅程)의 절반쯤에 도달한 것이냐고 물었다. 스승은 아니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숨겨진 함정을 피하고 싶다면 길을 90% 가량 갔을 때 이제 반쯤 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의:활과 화살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프랑스 같은 몇몇 국가에서 활과 화살은 아직도 무기로 간주되고 있으며, 활쏘기를 하려면 자격증을 갖추고 허가된 장소에서만 해야 한다.)

- 중앙일보, 200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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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엘료의 편지 1: 죄의식과 용서


전세계 120여개국에 소개돼 2700만부 이상 팔린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57)가 기고문을 중앙일보에 보내왔습니다. 그의 글을 세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코엘료는 브라질 출신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TV 극작가, 대중음악 작사.작곡가로 일했습니다. 당시 브라질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 투옥된 적도 있습니다. 1988년 발표한 '연금술사'로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아의 신화'를 실현하도록 권하는 '연금술사'는 특히 불황기에 사랑받는 소설로 알려졌습니다. 국내에서도 25만부 넘게 팔렸습니다. 코엘료는 브라질에 비영리 단체(코엘료 인스티튜트)를 세워 빈민층 어린이 교육, 노인 자선사업도 펼치고 있습니다.

메카로 순례를 떠난 한 신실한 남자가 불현듯 신(神)이 바로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황망히 땅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린 채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제 소원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가 일생 동안 결코 당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노라." 신이 대답했다.

남자는 깜짝 놀라 어째서냐고 물었다.

"네가 내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용서할 이유도 없다. 내가 너를 용서할 일이 없다면, 너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사랑 안에서 너의 길을 가고 가끔 내가 너를 용서하게 된다면, 너는 그러한 미덕을 잊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안고 있는 죄의식과 용서의 문제를 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어머니들이 이렇게 푸념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애가 그런 짓을 한 건 나쁜 친구 때문이에요. 우리 아이는 본래는 나쁜 애가 아니라구요."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에 따르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우리를 화나게 한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야 한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게 된다. 용서는 죄의식이나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은 모두 실수를 저지르며, 실수를 통해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해지면-특히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인 경우-우리는 고립되고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된다.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용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일에 왕도란 없겠지만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한 행동을 그 의도가 아니라 결과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다 선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야기했을지 모르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페르시아의 코스로에스 왕이 어렸을 때, 그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스승이 한 사람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스승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를 매우 심하게 벌했다. 세월이 흐르고, 코스로에스는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이 된 후 그는 예전의 스승을 불러다놓고 과거에 그를 부당하게 벌한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토록 심하게 나를 벌했는가?" 왕이 물었다.
"폐하는 자질이 뛰어나 곧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의가 한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걸 깨달으셨겠지요. 저는 앞으로 폐하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예전에 일본 교토에서 가졌던 저녁식사 자리가 생각난다. 그때 한국인 교사 김태창씨는 서구적 사고방식과 동양적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서양에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행하라.'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의 모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에도 비슷한 격언이 있습니다.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이 격언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부과한 행복의 기준은 물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사랑을 표현하는 나의 방식만 다른 이들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그리고 오래된 아랍 속담엔 이런 게 있다. '신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로 그 나무를 평가한다.' 또한 이런 속담도 있다. '때린 자는 잊을지 몰라도 맞은 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

- 중앙일보, 200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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