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복서 김주희 "발톱 빠지도록 연습해 챔피언 먹었어요"

김남인 주간조선 기자 artemis@chosun.com
입력 : 2005.01.22 11:26 41' / 수정 : 2005.01.22 12:05 22'


두 주먹 야물게 쥐고 무적 멜리사 셰이퍼(26·미국)를 때려눕힌 열여덟 살 복서를 만나려면 먼저 찬바람이 ‘쌩-’ 들이치는 건물 입구부터 찾아야 한다. 다 떨어져나간 계단 손잡이와 활짝 열어젖힌 화장실을 지나, 어둑한 전구 불빛 아래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거인 체육관’(서울 문래동)을 발견할 수 있다.

1월 10일 오후 7시. 10여명 관원이 내뿜는 열기와 땀 냄새로 체육관 안이 후끈하다. 가수 ‘비’의 노래에 맞춰 ‘퍼억 퍽’ 샌드백 두드리는 소리와 줄넘기줄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야, 너 비스듬히 서서 연습하지 말라고 했잖아. 차라리 정면으로 거울을 보든가 아예 거울을 무시해 버려.” 링 모서리에 걸터앉은 여자복서. 그녀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자 옆에서 훅을 날리고 있던 고등학생의 두 볼이 빨개진다. 옹다문 입과 꿰맨 자국이 선연한 콧등, 세계 챔피언 김주희는 어린 관원들 사이에서 군기반장이다.

“약점 노출시키면 그땐 끝이에요”

지난해 12월 19일 김주희는 경기 성남시 신구대학에서 열린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 플라이급(48.98㎏ 이하) 세계 챔피언 결정전에서 전승가도를 달리던 셰이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3 대 0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하얀 피부에 레게퍼머를 한 10대가 세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것이었다.

“(셰이퍼를) KO시키려 했는데 7회전 때 오른손이 우두둑하면서 부러지는 느낌이 왔어요. 주먹이 울리고 아팠지만 표정관리하면서 작전을 바꿨죠. 상대한테 내 약점을 노출시키면 그땐 끝이에요.” 그는 이 대회를 위해 7개월간 3500㎞를 뛰고 400회 이상의 스파링을 했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작년 5월에 열린다던 대회가 스폰서를 못구해 7개월간 열 번이나 미뤄졌기 때문이다.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도 뛰었어요. 발톱이 모조리 빠지고 발바닥이 다 찢겨질 때까지. 어차피 권투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거든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운동인걸요.”

김주희는 원래 육상선수였다. 빈혈이 심해 운동을 접으려던 1999년, 그녀는 언니가 다니던 체육관에 우연히 들렀다가 글러브를 끼게 됐다. “살도 뺄 겸 재미로 한 달만 해보라”는 말에 시작한 권투. 육상선수였던 덕에 발은 빨랐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자질을 갖춘 건 아니었다. 정문호 관장이 세계 챔피언의 싹을 알아본 건 김주희가 처음으로 링에 올랐던 때였다. 상대 남자선수 주먹에 맞아 쌍코피를 주륵 흘리면서도 끈덕지게 덤벼드는 김주희에게서 근성을 발견한 것이다.

“링 위에 서면 운동 많이 한 사람이 이겨요. 제가 졌다면 그건 상대보다 연습을 덜 한 거죠. 저번 대회 때도 ‘네가 발톱이 다 빠지도록 뛰어봤느냐, 눈이 주먹만큼 부어오르게 맞아봤느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상대선수와 붙었어요. 시합에서 지면 이제부터는 잠 안자고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링에 오를 때, 숨이 차오르고 힘이 떨어질 때 그런 생각을 해요.”

남자친구도 아직 없어

훈련을 건너뛴 적도, 고된 연습에 주저앉아 울어본 적도 없었다. 두 다리가 하루 15㎞를 뛸 동안 링 위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수가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여덟 바늘이나 꿰맨 콧등은 조금씩 주저앉는 중이고 보습크림 바르며 아껴야할 피부엔 얼룩덜룩한 멍이 가득하다. 권투를 시작한 지 6년째,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지만 맞는 건 여전히 아프고 두렵다.

“한 대 맞으면 욱 하는 게 올라와요. 안 그럴 선수가 있나요.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최소한 두 대는 때려야 이기는 거니까. 코가 낮아지긴 했지만 뭐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세우면 되잖아요.(웃음)”

김주희가 잘 나가기만 한 건 아니었다. 2002년 여자 초대 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대선배 이인영과 맞붙었지만 4라운드 TKO 패를 당했다. 지긴 했지만 김주희가 뜨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 SBS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찍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싫다고 했어요. 그냥 운동만 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드라마 작가분이 관원인 것처럼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녹음기를 허리에 매달고 줄넘기를 하면서 저와 관장님 대화를 엿들었어요. 행동이 어째 이상해 관장님이 불러다놓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제서야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오케이했죠. 제가 주인공들 가르치고 같이 뛰었어요.” 2003년 드라마 ‘때려’가 방영되면서 ‘얼짱 복서 김주희’의 주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인터넷상에 팬클럽이 만들어졌고 현재 회원이 5000명을 넘어섰다.


“으~ ‘얼짱’이란 말 싫어요. 제가 어딜 봐서 얼짱이에요. 시합 포스터가 붙으면 친구들이 ‘상대 선수는 눈을 저렇게 부라리는데 넌 너무 어리버리해 보인다’고 해요. 남자친구도 없어요. 훈련 스케줄을 보세요. 누굴 만날 수나 있겠어요.” 얘기는 그렇게 해도 ‘얼짱’이란 말에 두 볼이 발그레해지고 굳은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린다. 서늘한 눈가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도 링 밖을 벗어나면 친구 사이에서 ‘왕수다’로 통하는 평범한 10대일 뿐이다.

김주희의 꿈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미 딴 IFBA를 포함한 4대 타이틀 통합 챔피언이 되는것. 자신의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친언니에게 보은하고 싶은 마음이 주먹보다 앞선다. 10여년 전 집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준 사람이 바로 그의 언니였던 것이다.

“저한테는 언니가 엄마예요. 아르바이트하고 회사다니면서 관비도 대주고 필요한 걸 사줬어요. 뭐 사야 한다고 말하면 ‘그거 너무 비싼데’ 이런 소리 한마디 한 적 없었어요. 내 동생이 새벽부터 뛰는데, 죽을 만큼 권투에 매달리는데 뭘 못해주겠냐고만 했죠.”

경비일을 하는 아버지가 막내딸이 권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02년이었다. 이인영 선수와의 대결에서 무너지는 딸의 모습을 TV를 통해 본 것이다. 괜한 걱정 끼칠까봐 아버지에게 권투한다는 말을 차마 못한 것이다. “챔피언이 되면 말하려고 했거든요. 아셔도 모른 척 하신 거 같아요. 매일 맞아서 붓고 멍든 몸으로 들어오는데 왜 모르셨겠어요. 세계 챔피언 딴 날은 아빠도 아주 크게 웃으셨어요.”

그녀는 1월 15일 일본 전지훈련을 떠났다. 4대 통합 타이틀 도전에 앞서 4월 2일 일본의 가미무라 사토코와 1차 방어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저는요, 1억~2억원씩 들여가며 경기를 열어주는 분들, 돈을 내고 경기 보러오는 분들 생각하면 고마워서 연습을 게을리할 수가 없어요. 2005년 1월 1일부터 챔피언은 없어요. 그냥 ‘도전자 김주희’가 있을 뿐이죠. 이기고 지는 건 두 번째 문제예요. 정말 멋진 경기를 하고 싶어요. 기대해주세요.”

이 기사는 주간조선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스타클릭

생년월일|1986년 1월 13일

가족|아버지, 2녀 중 막내

학력|영등포여자고등학교 졸업

키·몸무게| 160㎝·48㎏

체급|플라이급 & 라이트 플라이급

전적|9전7승1무1패(2KO)

2003년|한국 플라이급 챔피언

2004년|한국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WIBA 주니어 플라이급 2위

IFBA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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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se/news/200501/2005012200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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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중앙일보 선정 새뚝이] 1. 사회

세상에 희망 준 아름다운 도전



2004년 한국 사회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 통과, 수도 이전 문제 등 나라를 뒤흔드는 논란의 폭풍에 휩싸였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 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열거나 어두운 곳을 밝혀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준 새뚝이들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실하고 긍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개척한 소녀, 고난을 뚫고 대학 진학에 성공한 장애우, 금남의 대법원에 여성으로서는 처음 입성한 판사 등이 그 주인공이다. 남들이 다 어렵다고 여기는 일에 과감히 도전한 이들도 포함됐다. 새뚝이는 남사당놀이에서 하나의 놀이판을 끝내고 새로운 장을 여는 사람을 말한다. 낡은 관습을 허무는 신선한 생각과 활동으로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사회부.정책기획부.수도권부


***가난 이긴 독학 … 골든벨 울려 , 문산여고 지관순양

역경을 딛고 꿈을 이뤄 사람들에게 용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 사람. 경기도 파주시 문산여고 3학년 지관순(19)양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양은 지난달 7일 KBS-1TV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에서 퀴즈 50문제를 모두 풀어 혼자 골든벨을 울렸다. 전국 248개 고교에서 100명씩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지만 골든벨 타종자는 43개교에서만 나왔을 정도로 배출이 어렵다. 게다가 지양의 실력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성실한 생활과 꾸준한 독서를 통해 쌓은 것임이 알려지면서 감동은 더욱 컸다.

사실 방송 당일까지만 해도 지양은 그저 똑똑한 학생으로만 여겨졌을 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양의 성공 뒤에 숨은 눈물겨운 성장 과정이 소개되면서 수많은 국민이 감동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지양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오리를 기르는 등 집안일을 도우면서도 늘 마을 도서관 등에서 빌린 책을 가까이했다.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합격, 문산여중에 들어갔지만 기초가 부족해 성적이 전교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수업에 충실하고 방과 후 학교 독서실에 남아 밤 늦도록 책과 씨름한 끝에 3학년이 되면서 성적이 상위권에 올랐다.

고교에 진학한 뒤에는 아침에 친구들이 보충수업을 받는 동안 학교에서 우유를 배달하는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방과 후에는 매일 두 시간씩 초등학생들을 과외 지도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 지양은 꿈을 묻는 질문에 "대학에 진학하면 동양사를 전공해 이웃 강대국들의 역사 왜곡에 맞서는 학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수능부정 사이버 수사로 캐내, 서울경찰청 김재규 대장

3억건 가운데 의심스러운 문자 메시지 550여건 추출.

서울경찰청 김재규(42.경정) 사이버범죄수사대장은 28명의 대원과 함께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워 보이는 일을 해냈다.

뚝심과 팀의 단결력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이를 기초로 경찰은 휴대전화를 이용한 수능 부정 수사에 착수해 374명의 용의자를 입건할 수 있었다.

김 대장은 "나이 어린 학생들이 처벌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한 수험생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도록 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직한 학생들이 부정을 저지른 학생들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도록 만든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도 했다.

경찰대 2기 졸업생인 김 대장은 서울경찰청 수사 2계장이던 2000년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사이버 공간에서 범죄가 급증할 것으로 내다보고 사이버범죄수사대 창설을 주도했다.

사이버 경찰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자신도 인터넷정보검색사.무선인터넷관리사 등의 자격증을 땄다.

지난해 4월 사이버수사대장에 임명돼 637만명의 개인정보를 불법 유출한 통신회사 직원 등 일당 15명을 검거해 부하 직원 일곱명이 한꺼번에 특진하는 경사를 맞았다.



***대법관 '금녀의 벽' 최초로 깨, 김영란 대법관

대법관 제청을 앞두고 법원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던 지난 7월 김영란(48)판사가 대법관에 임명됐다. 한국의 여성 대법관 1호다. 지난해 8월 전효숙(53)판사가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 된 데 이어 대법원에도 여성이 입성함에 따라 사법부에서 금녀의 벽이 사라졌다.

40대 여성 대법관의 탄생은 서열을 중시하는 법원의 인사 관행에 비춰보면 파격이다. 김 대법관은 사법시험 20회(1978년 합격)로 지난해 9월 임명된 김용담 대법관(사시 11회)과 무려 9년 차이다. 이 때문에 참여정부가 구상하는 사법부 개혁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 대법관은 남녀차별개선위원회 비상임위원, 서울 종로구 선거관리위원장을 맡는 등 대외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시민단체에 의해 대법관 후보로 추천됐다. 일부에서 그의 개혁성이 과장됐다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여성 대법관의 탄생은 사법부가 사회 각 분야 소수자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까지 부인하지는 못한다.

김 대법관의 남편은 검사 출신으로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지낸 강지원(55) 변호사다. 강 변호사는 부인이 대법관이 된 뒤 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직을 사퇴하고 공익 위주의 변론만 맡고 있다.



***시각장애 딛고 서울법대 입학, 1급장애인 최민석씨

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1급 시각장애인 최민석(22)씨. 13세 때부터 앞을 전혀 보지 못하지만 한번도 변호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을 법률로 돕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두꺼운 점자 참고서와 녹음기를 끼고 학업에 전념한 그의 고3 수험생활은 역경 그 자체였다. 서울맹학교에서 침.안마 수업을 끝내고 귀가한 뒤 밤 늦도록 공부에 매달렸다. 점자 번역을 위해 참고서를 싸들고 복지관을 돌아다닌 어머니와 퇴근하자마자 돌아와 교과서를 읽어준 아버지의 열성이 합격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합격한 뒤 소감을 묻는 질문에 "기본서 외에 점자로 된 참고서가 없어 힘들었다"고 말해 장애인 학습권을 사회 문제로 떠올렸다.

그러나 최씨의 입학은 험난한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점자 교재를 마련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1000쪽이 넘는 법학 관련 서적들을 점자로 옮기는 데 몇개월이나 걸렸다. 2학기 교재를 준비하기 위해 1학기 초부터 점자 번역을 시작했을 정도다. 그는 "2학년이 되면 고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여건을 보면 엄두가 안 난다"며 "법률 서적 출판사들이 서울대에 문서 파일을 양도해 주면 점자 프린트가 원활해질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수도이전 위헌' 결정 끌어내 , 이석연 변호사

이석연(50)변호사는 지난 9월 21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 변호사는 이 특별법이 위헌임을 주장하는 원고 측의 소송 대리인이었다.

그와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은 이 결정이 그의 소신과 뚝심이 가져온 결실이라고 평가한다. 헌재가 위헌 근거로 든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이란 개념은 이 변호사가 재판과정에서 거듭 주장한 논리였다. 그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헌법소원 기획에 나서 수도 이전으로 피해를 보게 될 300여명을 청구인단으로 모집하는 등 1인 다역을 마다하지 않고 맡았다.

위헌 결정으로 정부가 추진해온 수도 이전 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이 사건은 국가적 과제를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 변호사는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법률안 등 '4대 개혁입법'도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본다. 그는 "국가기관이 헌법에 어긋나는 일을 할 경우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속해서 '헌법 등대지기'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10여 전부터 정치에 입문하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고 있으나 그는 "전혀 뜻이 없다"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외자유치 앞장 선 노동운동가 , 이화수 한국노총 경기 의장

"지역 경제가 살아나면 노동자의 삶도 좋아진다. 노조가 외자 유치 같은 일자리 창출 노력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하다."

이화수(51)한국노총 경기도지역본부 의장은 올 들어 손학규 경기도지사 등과 함께 외국 투자 유치 출장에 세차례 동참해 지금까지 17억달러(46건)의 외자를 경기도로 유치하는 데 한몫했다. 이 의장은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한국 근로자들은 해외 기업의 투자를 원하고 있으며, 외국인 회사에서의 노사분규는 최대한 자제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신뢰감을 심어줬다. 그는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면 일자리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 첨단 핵심 기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노조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24년간 노동운동을 하며 강성으로 통했던 이 의장은 "그동안 노동운동은 목표를 정하고 투쟁해 관철시키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국민이 그 같은 방식을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동자는 물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새롭게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장은 "일자리가 줄어들면 노조의 존립 기반도 위태롭게 된다"며 "일자리를 만들어 전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책임 있는 노조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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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news.joins.com/society/200412/12/2004121218301390013000310031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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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밭의 낙지잡이 아버지 생각하며 공부했습니다"

낙지잡이 아버지와 사법연수생 아들
김경수 주간조선 인턴기자 sumnom@gmail.com
입력 : 2004.12.04 08:43 34'


▲ 최승현씨

“아버지, 합격했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한평생 갯벌에서 낙지를 잡아온 최창수(52)씨에게 지난해 12월 3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서울에 있는 큰 아들 승현(29)씨가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망우면의 작은 섬 탄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아무도 뭍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이곳에 현재 8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승현씨의 합격 소식이 전해진 날, 유사 이래 최초의 사법고시 합격자가 나온 작은 섬에서는 오랜만에 잔치가 벌어졌다. 탄도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망우면 주민들까지 “축하합니다” “워~매 오지게 좋겄소!”라고 최창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사무소 앞에는 “경축! 갯벌의 아들 최승현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낙지를 파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웃 마을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후로는 낙지 한 마리 팔 때마다 껄껄 웃더라니께”라고 전했다.

아버지 최창수씨의 말이다.

“어릴 때부터 아들이 공부는 잘 했소. 섬에서 학교 다닐 때는 내 농사일도 잘 도와줬고.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는 매번 장학금 받고 다녔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지 하고 싶은 거는 다 못하고 살았겠지만 불평 한번 안하고 반항 한번 안하고 착했지. 없으니까 아껴 살려고 바둥바둥 대는 모습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어쩌겄소. 다 지 팔자요. 아, 부모가 돈이 없는데 어쩔꺼여. 내려와서 선생이나 하면 더 바랄 게 없었는데.”

아들 승현씨는 전교생 수가 30명 남짓한 탄도분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혼자 섬을 나와 자취 생활을 했다.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경찰대학교를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아들 승현씨의 말이다.


▲ 최창수씨
부모님, 낙지 못잡는 겨울엔 ‘막일’

“경찰대는 학비도 안 들고 생활비도 안 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성격이 좀 보수적이고 내성적이라 경찰 일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원했다가 떨어졌는데 조금 아쉽더라고요.”

그는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닌 그는 졸업 성적도 우수하다. 연세대 법학과 백태승 교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 할일 묵묵히 하는 말없는 학생”으로 그를 기억했다.

그는 사법고시에 한 번 낙방했다.

“공부가 부족했는지 떨어졌습니다. 1차 시험 한 번 떨어지고 보니까 계속 돈 들어갈 일만 생기는 것 같아서 우선 공군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제대해서 한 번에 붙겠다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군 제대 후, 여동생과 함께 사는 건국대 앞 자취방에서 고군분투, 2002년 사법고시 1차시험 합격, 2003년 2차시험 합격까지 한 번에 해냈다. 갯벌의 아들이 꿈을 이룬 것이다.

지난 11월 20일 오후 3시, 경기도 일산 장항동 사법연수원에서 최승현씨를 만났다. 그는 작년 사법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이후, 올 3월부터는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중학교 때였는데, 겨울 방학에 집에 가도 부모님이 안 계시더라고요. 겨울에는 할머니가 밥을 해주셨어요. 겨울에 한창 추울 때는 농사도 쉬고, 낙지잡이도 쉬는데, 어머니, 아버지는 목포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감귤 따러 가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울에 막일해서 돈 얼마나 버셨을까 싶은데, 그게 부모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매번 겨울 방학 때마다 집에 가도 안 계셨어요. 부모님께서 그렇게까지 고생하시는데, 불만 있고 부족한 일 있어도 말 하면 안되죠.”

사법고시를 보는 수험생들은 고시학원을 필수적으로 다녀야 하고, 사야 할 책도 많다고 한다. 요즘은 “고시도 돈이 있어야 본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고시 공부에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시원에는 안 들어갔어요. 요즘 서울 신림동 고시원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좀 불편해도 내가 사는 집이 있는데 괜히 따로 돈 쓸 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미안했어요. 그냥 여동생이랑 같이 살면서 고시 공부했습니다. 학원비며 책값, 밥값, 용돈까지 매달 50만원씩 아버지가 꼬박꼬박 부쳐주셨어요. 낙지 팔아 번 돈이요.”

그는 매달 갯벌에서 아버지가 부쳐주는 50만원으로 생활하고 고시 공부까지 했다. “돈이 모자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이다.

“괜찮소. 괜찮소. 할 만했어요. 내가 뭐하러 일하는데요. 낙지가 돈도 되고 효자지요. 낙지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아 부담도 안 되고. 나는 (낙지잡이) 오래 해서 (낙지) 구멍 잘 보는 편이에요. 한 번 나가면 한 60마리 파서, 15만원은 벌어요. 연세대 학비는 왜 그리 비싼지, 그래도 지가 장학금 반은 받아 왔으니까 학비도 낼 만했고, 고시 공부한다고 얼마씩 보내주는 것도 할 만했소. 서울 집값은 왜 또 그리 비싼지, 전셋값 3000만원 마련할 때 그 때 조금 힘듭디다.”

갯벌에서 낙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낙지잡이들은 보통 1~1.5m를 판다. 60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도합 60m 이상을 파야 한다.<주간조선 1830호, ‘현장체험-무안 갯벌 낙지잡이’ 기사 참조>

아들의 말이다.

“갯벌에서 땅 파는 아버지 생각하면서 제가 뭘 더 욕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돈 없어서 고시 공부 못하는 세상도 바르지 않지만, 돈 없다고 고시 공부 못 하겠다는 사람도 바르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부모님한테 받기만 했어요. 이제 저는 직장 잡고 시작입니다. 다시 돌려드릴 때가 됐는데,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기만 하면 좋겠어요. 평생 일하시느라 한번 쉬시지도 못하고, 여행 한번 못 갔다오시고. 부모님 인생이 말이 아니에요.”

동생도 사법고시 준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공무원으로서 첫 월급 73만원을 받은 날, 최승현씨는 갯벌에서 올라온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동대문시장을 찾아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옷을 사드렸다. “이런 날도 있구나, 아이고.” 어머니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펴는 몸으로 승현씨를 꼭 안아주었다. 어머니는 평생 농사일, 낙지잡이 일을 해오다 허리에 디스크가 왔다. 서울에서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았지만 2년 전 끝내 농사일은 접어야 했다. 아버지의 말이다.

“집사람이 많이 아파서 걱정이지. 허리를 곧게 펴고 못 다녀요. 그래도 아직 내 할 일이 끝나지 않았지. 막내 아들이 아직 대학생(성균관대 법대)인데. 막내도 사법고시 본다니까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줘야 하지 않겄소. 걱정이 태산이오. 그래도 통장에 벌어놓은 돈 좀 있고, 허리가 좀 안 좋긴 하지만 아직은 내 몸이 움직일 만하니까. 그 후에는 자기들이 알아서 다 살겠지. 그렇게들 키웠어.”

아들의 말이다.

“동생 학비랑 생활비를 어머니, 아버지가 다 책임지시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이제 제가 돈 벌게 됐으니까, 할 수 있는 한 도와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후에도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들의 꿈은 검사. 내년 이맘 때 쯤에는 갯벌의 아들이 검사가 되어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법연수원의 아들에게, 갯벌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이들 ‘행복한’ 부자(父子)에게 각각 물었지만, 둘 다 수줍어 말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좌우지간 우리한테 어떻게 하든가 나는 됐고, 지만 잘 되면 된다”고 아들에게 부담주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낙지 식당만 보면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난다”고 말하며 부모님께 받은 ‘사랑’에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랑스런 아버지에, 자랑스런 아들이다.

뭍에서 섬까지 1.5㎞ 넘게 펼쳐지는 황토색 무안 갯벌, 이 갯벌이 낙지를 키웠다. 낙지는 자식을 키웠다. 저기 갯벌에 아직 당신의 아버지가 서 있다.

“아들아, 장하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꼭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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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2/200412040077.html

Posted by 【洪】IL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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