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망으로 불가능 극복이 탐험정신"

탐험가 허영호씨 초경량 비행기로 세계일주 도전
김재은 기자 2ruth@chosun.com
입력 : 2004.11.27 09:02 13' / 수정 : 2004.11.27 10:02 27'


▲ 탐험가 허영호씨
“자동차 보다 가벼운 220㎏짜리 비행기를 타고 과연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느냐는 의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지만, 1%의 희망으로 불가능을 극복해나가는 게 탐험 정신입니다.”

탐험가 허영호(51)씨가 이번엔 초경량 비행기 세계일주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25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허영호 후원회 ‘드림 앤 어드벤처(Dream & Adventure)’사무실 벽 곳곳에는 세계 지도와 초경량 비행기 모형도가 붙어있었다. 전세계 비행 항로 지도300여장이 책꽂이 한 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허영호씨는 “초경량 비행기의 최장거리 비행 세계 기록은 지난 2000년 남미와 북미,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약 4만 5000㎞로 알고 있다”며 “저는 5만5000㎞ 이상을 날아 세계 최고 기록을 깨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또 “광복 60주년을 맞는 내년 8월 15일까지 전 세계를 돌고 북한을 통과해서 돌아오고 싶다”며 “내년 초 출발할 예정이고, 북한의 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허씨는 “북한의 협조는 중국의 지인들을 통해 요청하고 있다”며 “한민족 최초로 초경량 비행기 세계 일주에 도전한 순수 민간 사절단 차원에서 비행기로 평양을 방문하고, 가능하다면 북한 청소년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돕고있는 가수 서태지의 공연을 보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타고갈 경비행기는 한번 연료를 채우면 최대 9시간 1000km까지 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행 경로는 추운 겨울에 출발하는 만큼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에 가고, 이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통과, 아프리카 혹은 유럽으로 건너간 뒤 북미로 넘어갈 계획이다. 그는 “북극해를 비행기로 횡단하는 게 여정의 큰 이벤트 중 하나”라며”라며 “물론 위험하지만 걸어서도 북극점을 두 번 다녀왔는데, 비행기로는 처음 통과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울에 도착할 때도 월드컵 당시 수십만의 인파가 모였던 광화문의 도로를 200m 가량을 활주로처럼 사용해서 착륙하고 싶다”며 “아직 서울시와 협의된 게 아닌만큼 인근에 청와대와 군사 보호시설이 있고 절차도 복잡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안되면 여의도 고수부지에 내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허씨는 조만간 정확한 출발 일정이 나오는대로 제주도와 일본, 대만 등을 순회 비행하는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를 위해서 서울 지방 항공청과 각국에 비행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허씨는 “아직 장거리 운행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류 변화 등이 변수가 될 것 같다”며 “대신 탐험의 노하우가 지도를 정확하게 읽고 목적지를 향해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행기 조종사의 꿈

허씨는 세계 일주를 5년 전 부터 착실하게 준비해왔다. 그는 “지난 1995년 남극과 북극, 에베레스트 3극점과, 7대륙 최고봉 완등에 성공한 뒤 어린시절의 꿈이었던 비행기 조종사에 도전해보려는 결심을 했다”며 “5년 전에 비행기 세계일주를 목표로 초경량 비행기 면허를 땄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에는 4~5억원을 호가하는 초경량 비행기 ‘스트릭 섀도우’를 4000여만원에 조립용 키트로 들여와 최근 완성했고, 경기도 양평과 이포의 비행장에서 틈나는대로 연습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탐험의 두배에 가까운 예산이 필요한 초경량 비행기 세계일주의 꿈은 그동안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탓에 번번히 좌절됐다. 허씨는 “대기업들을 찾아 다녔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며 “그때마다 허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는 초경량 비행기로 한국과 일본 경기장을 순회 일주하는 ‘한일월드컵 우정 축하 비행’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역시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다음달 초 서태지가 공동의장 대표를 맡아 출범할 예정인 ‘2005년 한민족 공익비전 스타 60인 회의’의 후원을 받아 어렵게 성사됐다.

허씨는 “서태지가 청소년들의 우상인 만큼 이번 세계일주도 누구보다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젝트”라며 “조기교육에 찌들고 패기를 잃어가는 요즘 청소년들을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비행 여정을 그대로 찍어서 1주일에 한번씩이라도 TV방송과 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보여준다면 청소년들에게 모험이 어떤 것이고, 왜 건강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교육적인 효과가 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허영호씨가 직접 6㎜카메라를 잡는 한편, 지난 10년간 허영호씨의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프리랜서 PD와 카메라 감독 등 촬영팀 5명이 비행 코스에 맞춰 지상으로 이동하며 동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허씨는 또한 “세계 일주 도중에 경유하는 도시에서 우리 교포들을 상대로 세계일주 여정과 탐험에 대한 강연이나 전시회도 열 것”이라며 “가능하다면 중국의 베이징과 미국의 LA등 교포가 많은 도시들에서는 서태지의 콘서트가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비행 구간을 정해서 교포 청소년들이나 소년소녀 가장 등이 비행기에 동승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아직 확정된건 아니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많다”고 말했다.

◆경제 불황 속 인기 강사

허영호씨에게 “거친 자연 속에서 탐험을 하다가 서울에 있을 때는 답답하지 않느냐”고 묻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뭐가 답답해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허씨는 “일년에 두세달 외국으로 탐험을 떠날때는 제외하고는 국내 기업과 관공서, 학교 등에 강의를 위해 불려다니기에 바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강의 이벤트 회사의 섭외 대상 1순위인 인기 강사로 알려져있다. 서태지와의 인연도 지난 5월 서태지의 블라디보스토크 공연을 보러가는 관람객 1200명을 대상으로 선상 강연을 맡은 게 계기였다고 한다.

허씨는 “강의 스케줄이 하루에 3건씩 있는 날도 있다”며 “제주도부터 전국 방방곡곡 안가본 데가 없다”고 말했다. 허영호 후원회 최재명 사무국장은 “경기가 좋을 때는 그래도 허영호를 덜 찾는데,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는 강의 요청이 쇄도한다”며 “그만큼 탐험정신이 국민들에게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는 힘을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허씨는 이날도 인터뷰를 마친 뒤 저녁 강의가 예정된 경기도 수원의 아주대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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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1/2004112700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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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라고요? 저, 수험생인데요"

48세의 나이에 고등학교 3학년 복학
아들과 수능시험 치른 ‘동양문고’ 김태웅 사장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입력 : 2004.11.27 09:21 50' / 수정 : 2004.11.27 09:27 50'

“야, 너도 이리 와. 안 그럼 형님 혼자만 나오잖아.” “야, 넌 좀 비켜. 머리가 너무 커서 안돼.”(까르르) “이러다 얼짱들 다 나오는 것 아니야?” “헉! 나, 로션 안발랐는데….” (웃음) “형님, 졸업기념으로 피자 한번 먹어요.” “그래, 한번 먹자.” “(학생들, 일제히 박수치며) 아싸~!”

수능시험을 끝낸 고등학교 3학년 교실. 마지막 기말고사가 남아있긴 했지만, 수능을 끝냈다는 홀가분함 때문인지, 교실엔 활기가 넘쳤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자, 일제히 폰카(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들며 웃음보가 터진다. “형님한테 모델료 주시는 거예요? 우리도 받아야 되는데….” 농담이 터져나온다.


▲ 동급생들과 함께 있는 김태웅씨. 회색 바지에 하늘색 셔츠, 감색 교복에 붙어있는 이름표엔 '김·태·웅' 석자가 선명하다.
“저 보고 (큰)형님이라 불러요. 젊음이 좋긴 좋죠?”

연매출 30억원의 중견 출판사 ‘동양문고’의 김태웅 사장. 그는 48세의 나이에 고등학교(삼육고) 3학년으로 복학, 고3인 19세 아들과 함께 2005 수능을 치른 ‘늦깎이’ 수험생이다. “시험은 잘 봤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나쁘지 않게 봤다”며 활짝 웃었다.

“늘 교복을 입고 다녀요.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편해요. 처음 교복을 맞추러 갔을 때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아무도 제가 학생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교복점 주인도 그랬죠. 그런데 아이는 없고 어른만 와 있으니, 좀 의아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입을 것’이라 말하기도 뭣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랬더니 ‘아이하고 체격이 똑같으신가 보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고 옷을 맞췄죠. 그런데 윗옷 길이가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길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왜 이렇게 길게 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아,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데요’라면서, ‘그래도 한 1~2년 지나면 짧아서 못입어요’ 그러더라고요. 허허.”

신문·껌팔이·구두닦이 하며 고학

웃으며 에피소드를 전해준 김씨. 하지만 그가 지나온 역정은 웃음처럼 편안하진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후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형편이 몹시 어려웠었어요. 어머님이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셨습니다. 저희 형제가 4남1녀예요. 바느질로 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돌린 신문이 조선일보예요. 구리지국에서 일을 했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까지 6년간 신문을 돌렸으니까, 제가 지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배달을 한 셈이 됩니다.”

김씨는 “지금 같으면 생각하기 힘든 일”이라며 “어머니는 구리에서 서울 휘경동까지 걸어서 일을 나가셨다”고 말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저는 새벽에 일찍 신문을 돌려야 했어요. 그런데 겨울이 돼서 길이 얼면 쉽게 미끄러지거든요. 그러면 새끼줄로 발을 꽁꽁 묶고 달립니다. 그땐 주택가에 개가 많았어요. 아, 이놈들이 얼마나 으르릉거리며 쫓아오던지….”

김씨는 “한 번에 120부까지 신문을 돌렸다”고 말했다. “그래도 생활이 힘들기만 했어요. 중학교 때 휘경동에 1호선 전철역이 생겼어요. 그래서 방과 후 역에 가서 껌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역무원한테 걸리면 껌을 뺏기기도 하고 머리를 거꾸로 땅바닥에 대는 원산폭격도 당하고 그랬죠. 교복을 입고 그냥 껌을 팔았으니까, 금방 눈에 띄었거든요. 그래도 그게 나았습니다. 교복을 입고 팔면 사람들이 잘 사줬거든요.”

김씨는 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새벽엔 신문을 돌렸고, 낮엔 학교를 다녔으며, 방과 후엔 껌을 팔았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이 이번에 김씨가 복학한 삼육고등학교다. “중화동에 새서울극장이란 극장이 있었습니다. 껌팔이들도 영역 같은 게 있거든요. 극장 근처에 껄렁패들이 많았는데, 한번은 걔들한테 걸려서 무진장 얻어맞았습니다. 1주일간 드러누워 학교도 못갔어요. 그게 제가 한 유일한 결석이었습니다. 10일쯤 지난 뒤 몸을 추슬러서 국기봉을 들고 갔습니다. 그때 6명 하고 싸웠는데, 걔들이 머리가 터져서 막 피가 나고 그랬어요. 결국 인근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저는 학생이란 점이 감안돼 무사히 나왔습니다. 걔들은 학생들이 아니었거든요. 선생님들이 저를 데리고 오면서 ‘태웅이가 형편이 어려우니, 선생님들 구두를 닦게 해주자’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학교에서 구두를 닦게 됐어요. 하루에 50켤레 가량 닦았습니다. 50켤레를 닦으려면 점심시간 내내 닦아도 다 못해요.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닦고, 방과 후에도 또 닦고, 그렇게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권고전학’ 당한 것이 평생의 한

김씨의 힘든 과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엔 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요즘의 학생회)이란 것이 있었어요. 고2 때 제가 대대장을 했었죠. 집안은 어려워도 공부는 잘 했거든요. 게다가 신문팔이·껌팔이·구두닦이를 다 하다보니, 거친 친구들도 좀 알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따르는 후배들이 생겼어요. 그래서 걔들하고 같이 ‘횃불클럽’이란 서클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1년 후배들이 담배를 피우다 걸린 거예요. 그 배후에 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죠. 학교에선 제게 ‘권고전학’을 시켰습니다. 사실상 제적을 당한 것이지요.”

김씨는 “집에 와 있으니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교문 앞에 가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 돌아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아는 애들 만나면 얼른 숨고…. 창피하니까요. 억울하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미웠습니다. 학교에 확 불을 질러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퇴학이란 것은요, 그 학생을 매장시키는 겁니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충격이 너무 커요. 저는 교육적으로 정말 반대합니다.”

김씨는 ‘성남직업훈련소’로 학적을 옮겼다. 그곳에서 선반기능사 2급 자격증을 획득한 김씨는 ‘현대양행’(오늘날의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다가 군대를 갔다온 뒤 출판사 고려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땐 정말 성실하게 일했어요. 제일 먼저 출근해서 화장실·계단까지 다 청소해놓고, 기다리고 그랬어요. 그런 점이 평가됐는지, 그러다 정식 직원이 됐습니다. 영업사원이 된 거죠.”

김씨의 인생은 그때부터 바뀌게 된다. 한 외국어 전문 출판사가 그에게 동업을 제의해 온 것이다. “그 친구는 편집을 맡고, 저는 영업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다 제가 ‘동양문고’를 인수해 독립,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나긴 시련 끝에 겨우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김씨. 그가 느닷없이 수능시험을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선 모두들 제가 대학·대학원까지 다 졸업한 줄 알고 있었어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모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쳤으니, 대학원을 나왔다고 하면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어머님도 항상 그러셨습니다. ‘내가 너 공부 못시킨 게 한이 된다’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꼭 삼육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학교가 너무 미웠었거든요. 그래서 교복 맞추기 전날, 아내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펑펑 울더군요.” 김씨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1학기 기말고사서 전교 1등도

김씨에겐 반 배정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들 중엔 제 후배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불편해 할 수밖에 없었겠죠. 서로 미루고 하다가 가장 나이가 많은 정상교 선생님이 저를 맡게 됐습니다. 그 선생님이 나이는 저하고 동갑인데, 사실 삼육고 1년 후배입니다. 수업시간에 제가 ‘차렷!’ 하고 구령을 붙이면요, 애들은 가만있는데 선생님이 놀라서 바짝 차렷을 해요. 허허.”

김씨는 3학년 1반 반장이다. 그는 “고문관 되기 싫다며 거절했는데도, 학생들이 꾸역꾸역 추천해 할 수 없이 반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나중에 자리를 함께한 정 선생님은 “형님(?)이 학생들 군기를 바짝 잡아줘서 1년간 매우 편하게 지냈다”며 웃었다.

‘늦깎이’ 김씨는 예상 외로 빨리 적응했다. 1학기 기말고사 땐 전교 1등을 하는 ‘노익장’을 과시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입시는 과목은 늘어났어도 공부하기는 더 쉬워진 것 같더라고요. 계획이라면 경영학과에 진학해서 못해본 대학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집이 어려워 공부를 못한 사람들을,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희 회사 ‘동양문고’ 홈페이지(dongyangbooks.co.kr)에 무료 어학사이트를 개설해 놓은 것도 그런 뜻에서입니다. 학원비가 없는 분들, 시간이 없는 분들은 많이 이용해주세요. 수개월치 동화상 강의를 무료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 ‘고3 CEO’(동양문고)란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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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411/2004112700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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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虎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17주기였습니다. 그때는 1987년이었죠. 이병철 회장의 장례식을 치른뒤 열흘뒤인1987년12월1일 셋째아들인 이건희(李健熙)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사진설명: 젊은날의 이병철 회장과 어린이 시절의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권을 물려받기까지 21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점심시간에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업무를 보고 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사돈인 홍진기(洪璡基)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이 고정멤버로 배석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1978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회장실 바로 옆방에 대기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스케줄에 맞춰 그림자처럼 수행했습니다. 매일 용인에 있는 아버지 숙소로 가서 취침을 확인한 뒤에야 귀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이건희 회장이지만, ‘삼성그룹 회장’으로서 경영 스타일은 아버지와 판이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인재관을 비롯한 몇가지 사항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평소에도 “난 도장을 찍어 본적이 없다. 도장을 가장 잘 찍는 사람을 뽑는 일을 한다. 내 인생의 80%를 사람에 신경을 썼다”고 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본인이 직접 사원들의 입사시험문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집단토론 시험의 주제를 직접 정해주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적성 검사를 도입할 때, 이 회장은 직접 집안의 보일러공이나 청소하는 아줌마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게하고, 일리가 있는지 따져본뒤 도입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도 외부 우수인력을 선발하는데 아버지 못지않게 열심이지요.

<사진설명: 노년에 접어든 이병철 회장>

출입기자로서 제가 흥미있게 지켜보는 것은 오늘날 삼성그룹을 만드는데 누구의 리더십이 더많은 기여를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진설명: '리움' 미술관개관식에서 연설하는이건희 회장 모습>

널리 알려진대로 이병철 회장은 1초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하고 치밀한 시간관을 갖고 있고, 모든 사업은 직접 현장을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세부사항을 직접 챙겼습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냉정한 조직관리에다, 주로 말하기(speaking)를 즐겼습니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자유방임형 시간관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 전략을 구상하거나 거시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이외에는 삼성그룹의 대부분 사안을 전문경영인들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저로서는 다소 헷갈리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미’를 강조하는 조직관리에다, 명백하게 듣기(listening)형 리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건희 회장이 어릴때부터 일본과 미국에서 거의 혼자서 유학하다시피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몰입하고 남의 말을 듣는데 주력하는 습관을 지니게 됐다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우선 이병철 회장은 시계추 같은 사람입니다. 출·퇴근시간은 칼처럼 지켰고, 시계도 보지 않고 일하다가 ‘탁’ 하고 펜을 놓으면 정확하게 12시 25분, 점심시간이었답니다. 목욕물 온도도 일정해야 했는데, 온도가 1도만 달라도 몸을 담그자마자 알아차렸다지요. 계절에 따라 골프 티오프 시간도 분 단위로 다르게 했다고 합니다. 만일 부하들이 자기의 파워를 ‘오버’시키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즉시 경고가 떨어집니다. 당시에 잘 나가던 소병해(蘇秉海) 비서실장의 파워가 막강하다는 소문이 돌자, 슬며시 소병해 실장을 불러서 “소군, 자네는 직책이 뭐꼬(‘무엇이냐’의 경상도 사투리)” “예, 이사입니다.” “그래, 이사제. 이사맞제”(‘이사지?’란 말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확인성 경고를 주었답니다.

<사진설명: 1997년11월19일 아버지의 1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이에비해 이건희 회장은 정반대의 행동 스타일입니다. 올들어 이건희 회장이 삼성본관 28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수면시간도 불규칙합니다. 요즘엔 규칙적으로 수면을 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지만, 얼마전까지만해도 24시간 연속 깨어있기와 24시간 연속 수면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남동 집에서 매년 수천 편의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지요. 삼성 정보팀이 매일 올리는 따끈따끈한 최신 정보에다, 전세계에서 발간되는 최신 과학기술 잡지를 숙독합니다. 휴대폰이든, 오디오든 웬만한 첨단 기기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한가지 깊게 파고들어 사물의 본질을 캐내는 작업이 그의 취미입니다. 그러다보니 상상력과 직관력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미래의 경영이나 기술이 어떻게 변화할지 수(手)를 읽는데 아무래도 유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삼성이 반도체나 LCD(액정표시장치)의 대형 투자를 할때는 모두 이건희 회장이 결단을 내려주었습니다.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단련된 ‘동물적인 감각’이지요. ‘동물적’이라고 한 것은 무슨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대신 삼성그룹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업무는 모두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나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맡기는 스타일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IMF체제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도 ‘집중과 선택’이라는 밑그림만 던져놓고 단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은채 실무를 구조조정본부에 일임했습니다. “팔아야 한다고 판단되면 오너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팔아라”고 분명한 방침을 내놨기 때문에 사장단들이 일을 처리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삼성과 빅딜 협상을 벌였던 다른 기업체 임원들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자기 판단에 따라 협상조건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혼자서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자연히 말하기보다 듣기에 능숙하지요.

물론 1993년 신(新)경영 때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LA 등지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짜리 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며3개월 동안 8500쪽 분량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하지만그는 보통 때는 열 마디를 듣고 열번 생각을 한 다음에 한 마디를 합니다. 혹시 남에게말을 걸더라도"왜" "왜" "왜"를 반복하면서 본질을 캐묻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워낙 말이 없다보니 부인 홍라희(洪羅喜) 여사는 바로 옆에 남편이 앉아 있는데도 삼성 비서팀에 전화를 걸어 “내일 회장님 출장은 어디로 가나요”하고 물을 정도랍니다.

<사진설명: 승지원(삼성 영빈관)에서 피오리나 HP 회장을 만나는 이건희 회장>

이병철 회장이 손끝에 닿는 즉물성(卽物性)을 중시하고, 이건희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력을 중시하다보니 현실의 사업에 대한 감각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 시대에 삼성에는 ‘돌다리도 두들겨본 뒤 다른 사람이 건너가는 것을 보고 건너간다. 또는 돌다리도 깨질 때까지 두들긴다’는 식의 신중한 문화가 강했답니다. 이병철 회장은 막연한 얘기나 막연한 사업추진을 아주 싫어했고, 잘못을 저지르면 즉각 징계를 내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뒤에는 ‘돌다리든 뗏목이든 나무다리든 뭐든지 건너라, 그래서 실패하면 상을 줘라’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건너다가 실패하면 상을 주라”며 “대신 실패를 기록해 자산으로 만들어라”고 했습니다. 1993년 이른바 신(新)경영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부실을 신고받고, 웬만한 것은 다 용서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계열사 사장들이나 비서실 팀장들이 보고할때도 드러납니다.
양 회장을 모두 보좌한 어느 고위 전문경영인은 “이병철 회장이 나를 찾으면 왜 찾는지, 뭘 물어볼 건지, 뭣 때문에 야단칠 건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예습’을 하고 가면 70~80%는 들어맞는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 하면 왜 부르는 건지 아직까지도 감을 못 잡는다. 무슨 얘기를 꺼낼지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어느 임원은 “이병철 회장이 중소기업형 리더라면, 이건희 회장은 대기업형 리더다. 이병철 회장은 직접 주3~4회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챙기고 지시했다. 아마 이병철 회장이 계속 경영했다면 아마 오늘날과 같은 삼성전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장들이 회장이 언제 갑자기 무슨 질문을 할까, 어떻게 대답할까에만 신경써면서 ‘쫄아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이나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권한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다르다. 소소한 일은 관여하지 않고 큰 줄기만 챙긴다. 다만 큰 흐름을 잘못 짚으면 혼이 나는 것은 더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아들들중에서 가장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고 장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둘째아들 대신, 좀더 멀리 내다보는 시각을 가진 셋째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시각이 동일하다고 봐야지요.

<사진설명: 개인 홈페이지를 공개해 화제가 됐던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이윤형씨>

오늘날의 삼성그룹이 만들어진 것은 이병철·이건희 양쪽 리더십의 장점이 잘 결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꼼꼼하면서도 미래를 크게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쪽의 리더십은 모두 단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단점끼리 만난다면 좋지 않겠지요. 과거 삼성그룹에서 나타났던 경직된 관료주의와 무모한 사업추진이 그런 것입니다.삼성은 자동차사업 진출을 비롯한 몇가지 사업실패 사례에서 이미 그런 걸 경험했습니다.

또 다른 우려는이런 것입니다.오너 회장으로서 카리스마가 지나쳐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아래에서 "와, 지당하신 말씀이고, 지당하신 행동"이라며 우러러받드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요.

지금 삼성은매년 10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올리며 독야청청 잘나가고 있지만, 그동안 타의로 옷을 벗고 회사를 떠났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란 바탕 위에서 오늘날이 가능했다는 점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어쨌든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삼성그룹의 비중을 감안하면, 이병철·이건희 두 사람의 리더십이 계속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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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713&logId=179539

Posted by 【洪】IL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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